이민교회의 복음변증

감독으로 섬길 때 교단 리더 모임에서 좋은 자료를 접할 때마다 처음에는 흥분이 되지만, 바로 드는 질문은 ‘이걸 어떻게 이민교회에 맞게 적용하는가?’였고, 매번 결론은 ‘좋긴 한데 적용하기는 힘들다’였습니다. 이민교회에 적합한 상황화 없이는 어떤 좋은 사역도 애만 쓰고 기대하는 결과는 없을 거고, 상황화를 하자니,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한데, 이민교회에는 그런 자원이 거의 없습니다. 복음변증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오늘날 이민교회에서 복음변증이 필요하지만 목회자에게 복음변증에 투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신학이나 변증을 전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같은 회중을 상대로 매주 몇 번씩 다른 설교를 하며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자입니다. 이민교회 목회자에게 적합한 복음변증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우리에게 적합한 복음변증을 모색하기 위해 우선 복음을 변증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청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겁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설득했습니다 (행 17:17-31).

설교자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감성에 호소합니다. 동시에 윤리적으로 호소하는데, 이건 설교자가 청중에게 설득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겁니다. 목사는 일단 그런 자격을 가졌지만, 은사에 의해 그 자격이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합니다. 로마서 15장 18절-19절에 의하면 바울은 이성적 호소, 감성적 호소, 그리고 윤리적 호소에서 탁월했습니다. ‘말’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행위’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기사와 표적’은 자신의 자격을 강화하는 겁니다. 물론 이 세 가지 호소가 반드시 동시에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은사를 강조하는 목회자는 감성적 호소에 강점이 있는데,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 자신의 자격이 강화되면서 청중이 설득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열매를 맺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처럼 이 세 가지 호소를 다 능히 할 수 있으면 더 풍성한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리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제 이성적 호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들과 세미나 또는 개인적인 대화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목사님들이 복음변증을 어렵게 여긴다는 겁니다. 복음변증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고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변증은 고도로 논리적이어야만 할 것 같은 겁니다. 실례로 최근까지 활동했던 유명한 변증가였던 라비 재커리어스는 고도로 세밀한 논증을 통해 변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민교회 목회자가 복음을 변증할 때 고도의 논증은 오히려 설득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청중은, 특히 한인 이민자는, 치밀한 추론을 지닌 세밀한 논증을 견디지 못하고 주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은, 특히 한인 이민자는 개연적인 결론에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세밀한 논증이 불필요하며, 오히려 세밀한 논증은 흥미를 떨어뜨려 설득을 방해합니다.

이민교회 목회자는 신자에게는 확신을 주고, 비신자와 의심자는 설득하려고 복음 변증 설교를 합니다. 설교는 청중이 볼 때 가변적인 인간사를 다루는 것이므로 특히 비신자나 의심자에게 무엇이 진리인지 확증시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증하려면 치밀한 추론을 지닌 세밀한 논증이 필요한데, 방금 언급한 것처럼 일반 청중은 그런 논증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피고가 혐의를 받은 범죄에 대해 유죄임을 입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납득되실 겁니다. 모든 법정 소송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 즉, 판사(들)의 주재로 검사(들)와 변호사(들)가 가담하여 치열하게 다툴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소송은 타협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지루합니다.

이렇게 설교는 비신자나 의심자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쉽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므로, 개연적인 것에 기초해서 어떤 관점이나 행동지침을 채택하도록 청중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나 발생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일에 기초해 설득하는 겁니다. 청중에게 ‘그럴 수도 있구나’하는 개연성만 보여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인식 변화는 중대한 변혁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저는 세 요소로 설교를 구성합니다: 세상 문화의 결함이나 실패를 드러내는 징표, 예화, 본문에 담긴 복음.

세상 문화의 결함이나 실패를 드러내는 징표. 비신자나 의심자의 사고를 지배하거나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세상 문화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완벽한 징표를 찾아내면 그걸 사용하겠지만, 그런 징표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틀릴 수도 있는 징표도 기꺼이 사용하여 설득합니다. 이것은 재판에서 정황증거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틀릴 수도 있는 징표를 사용하는 것은 유추하는 것과 비슷한데요, 이것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설득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청중이 가진 잘못된 생각을 흔들기에 충분한 겁니다.

예화. 예수님은 청중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여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화는 설득을 위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화는 아무것도 증명하지는 않지만, 개연성으로 이끕니다. 개연성은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거나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일이기 때문에 설득이 가능합니다.

본문에 담긴 복음. 복음주의자의 성경 해석의 으뜸 원리는 신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술이라는 겁니다. 본문에 복음이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더라도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깊이 묵상하면 담겨있는 복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본문에 담긴 복음을 상황에 적합하고 풍성하게 전하여 새로운 길/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면 비신자와 의심자만이 아니라 신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 즉, 믿음이 촉발됩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서 구원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합니다.

복음변증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노력하면 얼마든지 복음을 교회와 지역사회의 상황에 적합하게 신자와 의심자와 비신자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비신자만이 아니라 신자도 복음을 들어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촉발됩니다. 누구에게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겠고, 누구에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는 믿음이겠지요. 그러므로 복음주의 설교자는 성경과 찬송과 기도와 설교와 간증을 통해 자신이 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하며, 들은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