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판단하지 못해.’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야. ‘나는 그 누구의 판단도 필요 없어.’ 이런 독립 선언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을 피할 길은 없지 싶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는 남의 판단이 신경 쓰일 거고 자책할 겁니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처럼 우리의 본능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생 단톡방에서 읽었던 한 간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암 병동에서 야간 근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쯤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호출기로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는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창가 쪽 침대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된 환자였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황급히 커튼을 열자 환자가 태연하게 배 한 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간호사님, 나 이것 좀 깎아 주세요."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겨우 배를 깎아 달라니, 맥이 풀렸습니다. 그의 옆에선 그를 간병하는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런 건 보호자에게 부탁해도 되잖아요?"
"그냥 좀 깎아 줘요."
나는 다른 환자들이 깰까 봐 배를 얼른 대충 깎았습니다. 그는 내가 배 깎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번에는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배를 반으로 잘랐습니다. 그러자 예쁘게 좀 깎아 달라고 합니다. 할 일도 많은데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환자가 참 못마땅했지만, 배를 대충 잘라 주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쉬워하는 그를 두고 나는 서둘러 병실을 나왔습니다. 얼마 후,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뒤 그의 아내가 수척한 모습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간호사님, 사실 그날 새벽에 배 깎아 주셨을 때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 그날이 저희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깎은 배를 담은 접시를 주더군요. 제가 배를 참 좋아하는데, 남편이 손에 힘이 없어져 깎을 수 없어서 간호사님에게 부탁했었던 거랍니다. 남편의 그 마음을 지켜 주고 싶어서, 간호사님이 바쁜 거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그 날 배 깎아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나는 그 새벽 그 가슴 아픈 사랑 앞에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가.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의 전부였던 환자와 보호자. 그들의 고된 삶을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옹색한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는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말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떠나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것으로 충분했노라고,’
예수님은 마치 이 이야기의 아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이웃을 도와주려 했잖아. 그거면 충분해. 괜찮아.’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가 기대하는 만큼 받지 않으면 안 받은 거로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주지 않으면 안 준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남에게 무심할 때도 있고, 뭘 해줘도 옹색할 때도 있고, 남을 위해 조금 해주면서도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되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언제나 조금 더 조금 더 베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괜찮아’ 하십니다.
남을 위해 베푸는 건 좋은 일이고 우리는 당연히 이웃을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더 베풀어야 하는데’ 하는 압박감 속에서 베푸는 것과 하나님께서 압박을 풀어주어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베푸는 건 다릅니다. 하나는 끝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선 하는 거라 소소한 기쁨은 있겠지만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압박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하는 거라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설령 베푸는 게 자신이 보기에 작아 보이고, 받는 사람이 속으로는 안 받은 걸로 여기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을 닮은 귀한 존재로 지으셨는데, 이런 우리의 원래 모습이 점점 더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가 ‘나 자책할 거 없어. 잘했어.’ 한다 해도 그거 때문에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건 아닙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죠.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존재는 절대자 하나님뿐인데,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고된 삶에서도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또렷이 보게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