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교회의 위기와 선택적 변화

한인교회의 위기

교단의 감독으로 10년 동안 섬기는 내내 제 마음을 맴도는 질문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한인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가 필요한데,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였습니다. 목회자들이 고생을 많이 하는데, 교회도 부흥하면 좋겠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씁니다.

한국과 미국의 한인 교회는 분명히 위기에 처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은 벌써 위기를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에 대하여 1984년부터 2021년까지 거의 30년에 거쳐서 6차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를 요약합니다.

첫째는 종교인이 감소하고 있는 겁니다. 2021년 조사에 의하면 종교가 있다는 사람이 40%이며 없다는 사람이 60%라고 합니다. 종교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2004년을 기점으로 하락하고 있답니다.

둘째는 종교 활동의 감소입니다. 개신교의 경우만 요약합니다. 개신교인 중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람이 2014년 80%였는데, 2021년에는 57%로 감소했습니다. 주 1회 이상 성경 읽는다는 사람이 2014년 56%였는데, 2021년에는 42%로 감소했습니다. 매일 기도한다는 사람이 2014년에는 52%였는데, 2021년에는 37%로 감소했습니다.

셋째는 비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비종교인 중에서 호감이 가는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61%나 됩니다. 그래도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더니 불교를 선택한 사람이 20%, 천주교를 선택한 사람이 13%, 개신교를 선택한 사람은 6%에 불과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로는 54%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 때문이라는 사람은 예상과는 달리 19%에 불과했습니다.

넷째는 종교, 특히 교회의 게토화입니다. 조사 결과 기독교인과 비종교인이 문화적으로 서로 상당히 많이 벌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진 겁니다. 비종교인은 늘어나고,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는 줄고, 그런데 비종교인은 점점 더 기독교에 관심이 없으며 교회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기독교인은 더 교회 안으로 뭉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립된 공동체인 게토가 되어가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되는 지를 알기 위해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신교가 인구의 20%를 넘은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를 포함해도 인구의 25%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비신자가 늘어나는데, 비신자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에 무관심하거나 또는 기독교를 경멸합니다.

한국은 초고속으로 변화하는 사회입니다. 경제 성장, 정치 민주화, 그리고 세속화가 매우 빠릅니다. 한국 교회는 12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빠르게 성장하다가 인구의 25%를 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성장한 만큼 빠르게 쇠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현상에 이민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신자는 빠르게 늘고, 교인과 교회의 활동은 줄어들고, 교회는 점점 게토처럼 되어갑니다. 교인들은 이러한 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안해합니다. 이러한 위기는 Covid-19 훨씬 전부터 진행되어 왔고 Covid-19가 닥치자 표면으로 떠올라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민사회에서는 이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자가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빠르게 감소할 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한 결과가 오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적 변화

국가, 단체, 회사는 위기에 처했을 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변화를 모색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세 단계를 거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 첫 단계는 위기를 인정하는 겁니다. 담임 목사만 위기를 인정해서는 절대 충분치 않으며 위기에 처했음을 교회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역시 담임 목사만의 결단으로는 충분치 않고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교회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을 바꿀 것인지 선택하는 겁니다. 교회에 중요한데 잘 안 되는 걸 바꿔야 합니다. 교회로서 본질적인 것은 바꿔서는 안 되고, 잘 되는 것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두 질문을 염두에 두시면 바른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왜 전도가 되지 않을까?’, ‘왜 교인이 변하지 않을까?’

무엇을 바꿀지를 선택하기 위해 영적인 상태를 살펴봐야 합니다. 요즘 교회에서 서로 모순적인 두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게토화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가 입술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행동으로는 자신의 입술을 배반하는 겁니다. 교회가 바깥과 단절하고 안으로 향하면 영적으로 더욱 순수해야 하는데 오히려 영적으로 메마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같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가, 복음의 아름다운 선율이, 오늘날 신자의 일상에서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문화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반기지 않는데 교인이 이런 문화의 영향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8절-19절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문제는 반드시 동시에 해결되어야 하며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롬 15:18-19). 바울은 자신의 말, 행위,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했던 겁니다.

바울은 복음을 풍성하게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풍성히 알면 비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비신자가 와있다고 여기고 말씀을 준비하여 전하다 보면 어느 날 실제로 비신자가 예배 자리에 오지 않겠습니까? 복음적 설교는 신자에게 은혜와 교육이 되면서도 동시에 비신자에게는 다시 예배에 참석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바울의 “행위”로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행동은 이성으로 알 뿐만 아니라 감성으로 깊이 공감할 때 나옵니다. 우리가 복음을 풍성히 알고, 감성으로 깊이 공감할 때 비로소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드러날 것이고, 말로 전하는 복음과 합력하여 신자와 비신자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표적과 기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풍성히 알고, 복음이 삶에서 드러날 때 성령의 초월적 역사도 일어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확증됩니다.

성령은 신자와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말과 행위와 기사와 이적에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풍성한 모습으로 전하고.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도 관심을 갖도록 전하고, 그리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복음이 소식이 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과 관련되어 필요한 변화

교회의 모든 사역을 철저하게 복음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 교회는 복음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복음이 매우 중요한데, 복음이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면, 오늘의 한인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과 관련된 변화가 필요합니다. 복음과 깊이 관련된 전도와 설교에서 필요한 변화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을 비신자에게 전하는 전도에서 무언가를 바꿔야 하며, 복음이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의 귀에도 들리게 하기 위해서 설교에서 무언가를 바꿔야 합니다. 적합한 전도 방식과 전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에서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겁니다.

교인이 은혜 받은 이야기인 자신의 간증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간증 전도에 먼저 집중할 것을 권합니다. 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자신의 간증을 지니는 건 신앙생활에도 활력을 줍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간증이 지나친 자기 연민 또는 신앙의 자랑을 포함한 장황한 자랑이나 과시가 아닌 복음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기존의 전도 방식을 내려놓고, 은혜 받은 사람이 아는 이에게 자기가 받은 은혜를 전하는 간증 전도가 충분히 자리를 잡은 후에 굳이 더 필요하면 다른 전도 방식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간증으로 복음을 전하는 건 교회의 역사와 내내 함께해 왔으며 오늘의 한인 교회에서 시급히 회복해야 하는 전도 방식입니다.

복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인이 동기부여 되도록 설교의 내용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적 설교는 복음 자체를 나누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중점을 둡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설교는 주로 복음의 내용 보다는 복음의 열매를 상기시키면서 구체적인 순종을 요청하는 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복음의 내용이 간단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복음이 회중의 흥미를 끌기 힘들다는 오해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는 교인에게 구체적인 요청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설교가 이러한 요청을 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나누겠지만 복음의 내용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상당히 다양한 모습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요청은 소그룹, QT, 성경 공부, 심방, 또는 상담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며, 특히 요즘은 개인주의가 성행하는지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예배 이외의 모임을 하기 힘든 교회도 꽤 있을 겁니다. 교인의 신앙이 그 정도라면 설교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서 교인을 다그치기보다는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방어적인 자세를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복음적으로 변화하라는 도전을 받으면 대개 ‘나는 이미 충분히 복음을 전하고 있어’ 하면서 변화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복음적 설교로 바꾸는 것은 간단하지 않으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복음적 설교로 전환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지금까지 해오던 설교의 습관이며, 그것을 내려놓아야 변화가 가능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팀 켈러 목사의 교회 개척 지원 프로그램인 City-to-City에서 개척 훈련을 받았는데, 첫 과정이 철저한 de-education이었답니다. 복음과 교회 개척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지식과 습관을 버려야 복음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철저하게 예수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8-19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복음을 “풍성하게,” “비신자의 귀에도 들리게,” 그리고 “소식으로” 전하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풍성하게 전한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이한 우리는 선택적 변화를 해야 하는데, 중요한 복음 전하는 것이 잘 되고 있지 않다면 우선 복음을 성경에 있는 대로 풍성하게 전하도록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복음이 무덤덤해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격려와 도전이 무력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건 설교자가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인간적 또는 율법적으로 기울게 됩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말입니다.

복음은 하나, 즉 예수 그리스도인데, 성경은 복음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 교회에서 복음은 거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니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 입니다. 따라서 교인들도 교역자들도 복음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단순하지만, 전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우선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사람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셨다’라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다/낮추셨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3. 승리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복음을 최소 세 가지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1. 공관복음에서는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으로 묘사됩니다.

2. 요한복음에서는 복음이 영생으로 표현됩니다.

3. 바울서신에서는 복음이 대속과 칭의로 나타납니다.

이 둘을 결합하면 모두 아홉 개의 조합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기본적으로 아홉 가지 모습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니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아홉 가지 모습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홉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비우셔서/낮추셔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

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비우셔서/낮추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비우셔서/낮추셔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았다

7)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고 우리는 영원히 산다

9)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완전히 의롭게 하신다.

이 아홉 가지 모습에다 복음의 열매를 추가하면 복음이 더욱 다양해집니다. 다양한 모습의 복음은 다양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줍니다. 우선 복음의 열매로 자유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는데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십니다 (요 8:32). 복음이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에는 ‘죄에서 자유’, ‘억압에서 자유’, 그리고 ‘고통에서 자유’ 이렇게 세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더 있을 수도 있고요. 복음의 아홉 가지 조합에 ‘자유’에 관련된 세 가지 열매를 조합하면 총 27개의 조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자유 말고도 다른 열매들도 맺습니다. 복음이 맺는 열매는 치유, 회복, 우상 타파, 축복, 등등 많습니다.

복음을 풍성하게 전할 때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해지고, 설교가 교인들에게 흥미롭게 되어 은혜를 받으며, 교인의 신앙이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롬 16:26-27절).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고 듣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복음을 비신자의 귀에도 들리도록 전한다.

초기 교회 시대에는 신자는 거의 없고 인구의 대다수가 비신자였으며, 비신자는 기독교에 무관심하거나 기독교를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을 전했습니다 (롬 15:18).

이후 기독교 확장기가 되자 신자들이 증가하고 아직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신자들은 점차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바뀝니다.단정하지는 못 하지만 아마도 설교자들은 계속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했을 겁니다.

중세가 되자 서구에서는 대다수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서 신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비신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들의 관심은 신자를 헌신케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서구 교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서구 교회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여전히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서 신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비신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신자를 상대로 성경적인 신앙으로 회복하기 위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근현대 개신교 부흥 시기 역시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서 신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비신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신자의 결단과 헌신을 목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현재 서구에서는 중세 이래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신자가 소수가 되었으며, 다수인 비신자들은 기독교에 무관심 내지는 기독교적 가치를 경멸하며, 거기에 더해 무신론자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다수였던 적이 없었으며, 2014년에 인구의 21%로 정점을 찍은 이래 계속 줄어드는데 게다가 요즘 비신자들은 기독교적 가치에 관심이 없거나 경멸합니다.

오늘날 한인 교회가 초기 교회 때처럼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 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소명입니다. 힘들더라도 한인 교회가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에게도 복음을 들려주지 않는다면 소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교회의 교인은 더 줄고 교회는 더 고립된 게토가 될 겁니다.

복음을 비신자의 귀에 들리게 하기 위해서 복음 변증이 필요합니다. 복음 변증에 세 단계가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19-21). 첫 단계는 청자에게 있는 초월적 갈망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자를 향한 초월적인 갈망입니다. 둘째 단계는 청자가 지금 그 갈망을 허무한 데서 찾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 문화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잘못된 곳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정도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 단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 갈망이 채워질 수 있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을 깊고 풍성하게 알아야 하며, 믿음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비신자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기독교에 무관심하거나 무작정 반대합니다. 조금만 파고 들면 그들의 무지가 들어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탐구할 시간은 없지만 내심 의미와 사랑, 그리고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 지식도 얄팍합니다.

복음을 소식으로 전한다.

복음은 소식이기 때문에 소식을 가진 사람이 전합니다. 복음을 요구나 명령이 아닌 소식으로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자랑할 때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시 34:2). 복음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소식입니다. 복음을 들으면 곤고한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복음을 소식으로 전하기 위해서 설교에서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내내 그리스도의 부활로 복음을 전한 후에 마지막 절에서 짧고 강력한 도전을 합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58절). 그리고는 16장 1~4절에서 헌금에 대한 지시를 하는데, 헌금도 하나님의 은혜에 은혜로 반응하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의 은혜를 집중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대개 조급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복음을 대충 요점 정리하듯 전하고는, 그러다 보니 복음의 내용보다는 열매를 언급하고는, 순종을 길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에서 은혜와 율법을 조급하게 뒤섞으면 모순된 메시지가 될 위험이 크고, 서로 모순되는 메시지로 들리면 오히려 순종을 방해합니다.

2021년 여름 일본에 Covid-19이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올림픽을 강행했습니다. 올림픽 직전인 7월 말 일본의 코로나 일 감염자 만 명, 도쿄에만 5천 명 가까이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코로나 최고 경계 단계를 발령했는데 도쿄 시민이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대로변 가게들은 불이 꺼졌으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게마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습니다. 올림픽을 강행하는 것과 사회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권위에 순종하는 문화였음에도 시민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겁니다.

십여 년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선교적 교회 컨퍼런스인 Exponential Conference에 처음 참석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는 메시지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사들이 소개하는 교회나 사역마다 교인들의 헌신도가 무척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 같이 자세하고 구체적인 요청을 하지 않고 복된 소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한 후에 근본적인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소식이기 때문에 소식을 가진 자만 전합니다. 따라서 교인으로 하여금 소식을 가지겠다는 결단을 하도록 동기부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고 복음의 은혜로 대하라고 합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해서 믿음이 그리 연약하지 않은 교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무엇을 요청하기 위해선 동기부여가 먼저 있어야 하고, 율법적 요청으로도 동기부여가 가능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동기부여가 진실하며 오래 가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율법적 요청은 소그룹, QT, 개인 상담, 성경 공부를 통해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에게 복음이 소식일 때 성령께서 표적과 기사로 복음을 확증하십니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막 16:20). 설교자가 복음을 반복해서 듣고 기도하면서 전하면 주께서 표적과 기사를 복음을 확증할 것입니다.

맺는 말

지금 한국과 미국의 한인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전성시대에 통용하던 방식으로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의 본질인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을 성경대로 풍성하게 전하고, 비신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전하는 복음 변증을 해야만 하는 때가 된 겁니다.

복음을 변증하는 설교를 듣는 신자에게서는 섬김에 대한 동기부여를 기대합니다. 복음으로 은혜받으면 마음에 감추고 있던 불안과 의심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감사하다는 확신과 함께 교회에서 예배하고 섬기고 전도하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동시에 비신자는 복음을 변증하는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설교자가 복음을 성경대로 풍성하게 알고,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신자와 비신자에게 전할 때, 기사와 표적도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표적과 기사'로 신자와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변합니다. 따라서 힘들겠지만 조급함을 내려놓고 복음과 성령에 초점을 맞추고 꾸준히 말씀을 전하면 좋은 날을 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