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조선일보에서 읽었는데, 덴마크의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스벤 브링크만의 신간이 <불안한 날들을 위한 철학>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답니다. 그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유행하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라는 조언을 듣지 말고,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 흐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내면의 목소리’를 부정합니다. ‘진정한 나’ ‘진짜 원하는 일’ ‘진짜 원하는 사랑’ 같은 것에는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려면, 우선 우리 안에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 속에서,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자책하게 되겠지요. 일이나 사랑에 실패한다면 그건 당연히 ‘나’의 책임입니다. 모든 실패의 원인이 자신인 겁니다. 이래서야 어디 살겠습니까?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문학 교수요 작가였던 CS Lewis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갈망에는 언제나 그걸 만족시켜줄 그 무엇이 있다. 아기가 배고픔을 느끼는데 음식이 있고, 아이가 헤엄치기를 원하는데 물이 있고, 남녀가 성욕을 느끼는데 섹스가 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갈망에는 언제나 그걸 만족시킬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는 갈망을 들여다보면 스벤 브링크만의 주장처럼 우리의 내면에는 그 갈망을 채워줄 답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은 우리 안에도 없고, 물질적인 우주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초월적인 무엇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초자연적 존재로부터 인정과 아낌을 받으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과연 그 초자연적 존재일까요?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 선함, 정의, 또는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이런 것들은 ‘진정한 나’ ‘진짜 원하는 일’ ‘진짜 원하는 사랑’과 같이 실체가 없어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조상신, 수호신, 바리공주, 도깨비, 정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 그리고 종교의 신들과 여신들은 어떨까요? 인간은 그들로부터 인정과 아낌받기를 갈망하는데, 그들은 유한하고, 변덕스럽기도 하고, 때로 인간을 악의로 대하기도 합니다. 그들로는 우리의 깊은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는 초월적 존재는 무한하고 전지전능하며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인 겁니다. 배고픈 아기에게 음식이 있는 것처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하나님이 있습니다.